먼 거울, 인간은 반복된다.

역사책을 읽는 이유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바바라 터크먼의 『먼 거울』은 그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증명하는 책이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인간은 반복된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는 14세기 유럽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백년전쟁과 흑사병, 교회의 타락과 귀족들의 권력 다툼이 펼쳐지는 중세 시대의 기록 말이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놀라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600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마치 오늘의 뉴스를 보고 있는 듯한 기시감이 밀려온다.

『먼 거울』이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먼 과거는 낯선 세계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으로 읽는 한 시대

이 책의 독특한 점은 거대한 역사를 한 인물의 생애를 중심으로 풀어낸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프랑스 귀족 엥게랑 드 쿠시 7세다. 그는 기사도의 황금기와 몰락, 백년전쟁, 흑사병, 농민 반란, 교회의 분열 등 14세기의 거의 모든 사건을 경험한 인물이다.

터크먼은 그의 삶을 따라가며 한 시대를 복원한다. 덕분에 독자는 단순히 연도와 사건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공포와 욕망, 희망과 절망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이 책이 역사책임에도 소설처럼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흑사병과 전쟁, 무너지는 질서

14세기 유럽은 말 그대로 재앙의 시대였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도시와 마을은 순식간에 텅 비었고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인간의 행동이다.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이기적이 되기도 했고, 반대로 서로를 돕기도 했다. 일부는 종교에 더욱 의지했고, 일부는 모든 것을 체념하며 쾌락에 빠져들었다.

터크먼은 이러한 인간 군상을 냉정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한다.

특히 전염병과 사회 불안, 경제적 혼란이 동시에 발생하는 모습은 현대 사회가 겪었던 팬데믹 시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권력은 변해도 어리석음은 변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권력자들의 모습이었다.

전쟁으로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왕과 귀족들은 사치와 권력 다툼에 몰두한다. 교회 역시 신앙의 중심이기보다 정치 권력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읽다 보면 인간은 정말 발전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정치적 갈등, 지도자의 무능, 권력층의 오만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터크먼은 직접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적 사실을 통해 독자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오늘의 사회를 향하게 된다.

중세를 통해 현재를 읽다

『먼 거울』이 단순한 역사책을 넘어서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중세 유럽을 다루지만 사실은 인간에 관한 책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질병이 퍼지면 사회는 어떻게 변하는가.
불확실한 시대에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가.
권력은 어떻게 타락하는가.

이 질문들은 14세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먼 거울』을 읽다 보면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성찰하게 된다.

바바라 터크먼의 압도적인 서술력

무엇보다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바라 터크먼의 문장이다.

그는 역사학자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결코 딱딱하지 않다. 전투 장면은 긴장감 넘치고, 궁정의 권력 다툼은 정치 드라마처럼 흥미롭다. 당시 사람들의 삶은 눈앞에 펼쳐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묘사된다.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여기에 있다.

총평

『먼 거울』은 중세 유럽을 다룬 역사책이지만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서다.

흑사병과 전쟁, 종교와 권력, 탐욕과 희망이 뒤섞인 14세기 유럽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이 책만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작품은 많지 않다.

역사를 좋아하는 독자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명저다.

평점 : ★★★★★ (5/5)

“600년 전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결국 오늘의 인간을 만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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